[가정예배 365-8월 4일]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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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524장(통 313)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20장 31절

말씀 : 1920년대 미국의 산부인과 의사 로버트 디킨슨은 1만 5000여명 여성들의 신체 치수를 재어 평균을 냅니다. 이를 미국 여성들의 가장 이상적인 표준이라 정하고 조각상까지 만들어 ‘노르마’라고 이름 짓습니다. 문제는 이 표준 안에 들어오는 실제 비율은 1%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을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두 시각장애인이 듣습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드디어 예수님이 지나가십니다. 길에 있던 장애인들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주위 분위기가 이들에게 좋지 않아 보입니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마 20:31)

무리들이 이 두 장애인에게 조용히 하라고 면박을 줍니다. 그런데 이들은 전혀 무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더 크고 더 간절하게 주님을 향해 자비를 구합니다. 장애인들은 무리를 보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리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오히려 믿음의 진보를 가져옵니다.

무리는 수많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이들을 표현할 때 무리라고 한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붙일 수 없기에 군중, 무리라고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실체가 없는 ‘노르마’입니다.

교회는 무리가 아닙니다.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연약한 자들의 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로 떠돌아다니는 무리가 아니라 다른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장애인의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대신, 시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바로 자신입니다. 그들은 무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백합니다. 불평과 원망의 대부분 대상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입니다. 사실 내가 바라보고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남편과 아내를, 그리고 자녀를 바꾸고 싶은가요. 그럼 나를 바꾸면 됩니다. 교회가 변화되기를 원하나요. 그러면 내가 변화되면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나머지 하나는 주님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마 20:34)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믿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실체, 실상이 보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을 보며 시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실체 없는 ‘노르마’일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의 눈을 들어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 : 주님, 실체 없는 무리에 휩쓸리지 않게 하시며 믿음의 눈을 들어 영적 시력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김혁 변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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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더미션(https://www.themissi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