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력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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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전을 하거나 길을 가다 보면 하루 두세 번씩은 꼭 보게 되는 가게의 로고가 하나 있다. ‘세븐 일레븐’ 말이다. 아래 사진에 나오는 세븐 일레븐의 로고를 보고 뭔가 의심쩍은 눈길로 지나가는 이가 있을까? 나 역시도 과거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스쳐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 로고 속에는 뭔가 어색한 부조화가 하나 있다. 한 번 알아맞혀 보라. 
오래 전 일본의 한 사람이 처음으로 세븐 일레븐의 로고 속에 있는 부조화를 눈치 챘다. 

[2] ‘일레븐’이란 영어 스펠링 6자 속에 한 단어가 다른 단어와 매치 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 나오는 철자들(‘ELEVE’)은 모두가 대문자인데 마지막 단어만 소문자인 ‘n’자로 되어 있다. 대단한 관찰력이다. 
그래서 가게에 들어가서 왜 그렇게 씌어있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이 깜짝 놀라면서 자신도 처음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 주인이 미국 본사에다 이유를 묻는 편지를 띄웠다. 

[3] 미국 본사에서도 그 편지를 받아들고선 놀랐다고 한다. 
그들 역시 처음 알게 됐으니 말이다. 약 한 달 후 일본 가게가 미국 본사로부터 받은 답장의 내용은 이것이었다. “우리도 이거 처음 알게 됐음. 그래서 이거 처음 만든 사람을 찾아봤으나 근황을 알 수 없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세븐 일레븐의 고로를 보고 지나가지만 저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지구상에 한 명 밖에 없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4] 그만큼 사람들의 관찰력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별 생각 없이 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갈 때가 많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덮어놓고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성경은 덮어놓고 믿어선 안 되고 펴놓고 믿어야 한다. 농담이다. 성경은 펴놓고 읽되 아무 생각 없이 읽어선 안 되고, 꼼꼼하게 점검하고 분석하고 따지면서 읽어야 한다. 

[5] 글쓰기의 대가인 유시민은 관찰력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비결을 다음의 체험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다. “처음에는 재미로 토지를 읽었다. 그런데 읽고 보니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도 울리는 소설이었다. 인상 깊었던 대목을 다시 보고 싶어서 한 번 더 읽었다. 그런데 처음 읽었을 때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생각의길, 2015), 139). 

[6] 성경을 읽을 때도 같은 원리가 작용한다. 본문을 한두 번 읽고 지나치지 말고 적어도 세 번 이상은 주의력을 가지고 읽어야 초독 때 발견하지 못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을 대충 읽고 넘어가지 말고 꼼꼼히 읽으면서 모든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이해할 때까지 곱씹어 읽어야 한다. 이처럼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성경을 읽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따지고 드는 자세를 불경한 자세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7] 결코 아니다. ‘의문’과 ‘의심’은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영어로 ‘의문’은 ‘question’이고 ‘의심’은 ‘doubt’이다. 성경은 의심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한 번 읽고 그 속의 내용을 다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 때문에 본문을 읽으면서 언제나 질문을 제기하란 말이다. 

[8] 성경에는 문제가 없으나 그걸 대하는 우리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경에 의문을 많이 제기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 결과 지금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로 사역하고 있다. 내 경험으로는 천국만 침노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성경도 침노하는 자의 것이더라. 따라서 계속해서 성경을 침노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순간이 온다. 
그 때 깨달음의 기쁨은 세상 어떤 기쁨과도 견줄 수 없다. 

[9] 오늘 또 성경을 읽다가 지금까지 전혀 눈여겨보지 못한 구절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눅 17:11-19절에 열 명의 한센씨병 환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이 시키신 바대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러 가다가 병 고침 받음을 서로가 발견하게 된다. 그때 아홉 명은 제사장에게로 가고 한 명은 뒤로 돌아서 오던 길로 다시 간다. 이유가 뭔가? ‘예수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10] 그런데 오늘 그에 대한 생각에 문제가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본문 속에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내용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15-16절은 다음과 같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런데 17절 한 절 건너뛴 18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11]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이 본문은 그동안 적어도 100번 이상을 읽은 내용인데, 18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깨닫게 되었다. 우리 생각엔 이런 내용이 기록됐어야 하지 않은가? “이 이방인 외에는 내게 ‘감사를 표하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런데 ‘예수님 자신에게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림’의 내용이 15절에 나오는 저자의 설명에 이어서 반복해서 주님으로부터 나왔다.

[12] 본문을 기록한 누가의 설명과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중복돼서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해보라. 무슨 얘기를 할 의도였다 생각하는가? 열 명의 환자들이 만난 분은 예수님이다. 그런데 그분이 시키신 대로 순종했더니 자기들의 병이 나아버렸다. 누가 행한 일인가? 예수님이 행하신 일 아니겠나. 그런데 환자 한 사람은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 예수님께 돌아오던 중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3] 딱 한 절 뒤에서 주님은 이방인 환자 한 사람이 돌아온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었다고 밝히셨다. ‘반복’(repetition)은 ‘강조’(emphasis)의 의미를 갖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 때문에 병 고침을 받은 게 틀림없지만 하나님께 먼저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분으로 믿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 

[14] 이방인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드릴 목적으로 그분께 돌아간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의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믿고 그분께도 영광 돌릴 목적으로 돌아갔단 것이다. 이게 본문에서 더 중요한 사실임을 놓쳐선 안 된다. 
이 본문을 읽는 대부분은 ‘하나님께 영광 돌림’보다는 ‘예수님께 감사 표함’에 주목한다.
본문이 두 번에 걸쳐서 소개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15] 그래서 예수님은 19절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기적을 베푸시는 분(Miracle maker)으로 믿고 제사장에게로 돌아간 나머지 아홉 명과는 차별화 되는 믿음을 이 이방인 환자가 가지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신 것이다. 
성경을 꼼꼼히 관찰하면서 왜 두 번에 걸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림’이 언급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야 대부분이 놓치는 성경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본문이다. 

세심한 관찰력을 발휘하여 이 기쁨과 희열에 모두 동참해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