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행복자란?

[1] 19세기 초반, 당대 최고 경제학자였던 부친으로부터 혹독한 조기교육을 받고, 최고의 사상가로 성장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3살 때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그리스 고전들을 원서로 읽었고, 8살부터는 라틴어와 유클리드 기하학 대수를 배웠고, 12살 때부터는 논리학을 치밀하게 공부하고, 13살 때부터는 경제학과 과세의 원리를 배울 정도로 위대한 사상가로 성장했다. 

[2]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독서법에 있다 하여 한 때 그걸 배워서 자기 아이들에게 전수시키려던 한국 부모들이 야단법석 난리를 피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밀은 자서전을 통해 자신이 남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었던 비결을 밝혔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나이에 조기교육을 받은 밀은 20살이 되던 해 정신적인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3] 허전하고 음침하고 쓸쓸하고 아픔 없는 무감각한 슬픔들로 정신적 공항 장애를 겪을 지경까지 되었다. 그런 증상이 길게 지속되자 그는 깊은 사색 끝에 그 위기에서 벗어날 한 가지 위대한 질문을 생각해낸다. 
“인생의 모든 목표를 실현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추구하는 제도와 사상의 변화가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이것이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고 행복일까?”

[4]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렇지 않다.”
자기 마음의 대답을 듣고 난 순간, 그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어릴 때부터 쉴 틈 없이 치열하게 살면서 얻어온 모든 명성과 성취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에 1826년부터 1827년까지 2년 동안 하루 4시간 이상의 수면을 취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는 이전보다 더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여전히 갈등과 방황은 계속 됐다.

[5] 그러다가 어느 날 무심코 고른 한 권의 책이 절망에 빠진 그를 건지고 말았다. 프랑스의 작가인 마르몽텔의 회고록인데, 거기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접어놓고 자신의 행복이 아닌 다른 목표, 타인의 행복, 인류의 진보, 혹은 예술이나 기타 취미로 도구가 아닌 이상적인 목표로 삼아 마음을 쏟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을 목표로 삼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김종원, 『사색이 자본이다』 (사람in, 2015), 244-45)

[6] 이 놀라운 한 마디를 접한 이후 그의 방황은 마침내 멈춰 섰고, 그는 평생 그 내용을 가슴에 껴안고 살게 된다. 존 스튜어트 밀이 남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올바른 목표의식’이었다. 그렇다. 결국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는 것은 많은 지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목표의식’이다. 이 목표의식을 가졌기에 워런 버핏(Warren Buffet)이 우리 돈으로 주식 3조 8000억 원어치를 빌 게이츠 재단 등 자선단체에 기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성경에도 '제대로 된 목표 의식'을 가진 리더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셉을 보라. 그 역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의 흐름을 보고 산 사람이다. 
만일 그가 개인적인 꿈과 비전을 위해서 살았더라면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난 후 양식을 찾아 제 발로 찾아온 이복형제들을 사랑과 자비로 대할 수 있었을까? 만일 요셉이 개인적인 욕망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총리가 되고 나서 저리도 겸손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8] 절대 불가능이다. 자기만족과 성취의 야망을 가진 사람이 오랜 고난 끝에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뻐기고 교만을 떨지 훤한 일 아니겠나? 하지만 요셉은 자기를 위해 산 사람이 아니었다. 그 힌트를 창 45:7절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9] 기존의 간증집회 강사들이 주로 활용하는 간증 패턴을 생각해보라. 이런 패턴 아닌가? ‘오랜 세월 억울한 일이나 환난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참고 견뎠더니 마침내 하나님이 복 주셔서 이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서거나 부자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요셉의 간증도 그렇게 흘러갔다면 이런 구절이 기록됐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애굽의 총리로 높여주시기 위해 그런 억울한 일들을 참고 견디게 하셨음을 아노니.”

[10] 그런데 7절엔 그와 전혀 다른 내용이 소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내용인가? 
자기 성취와 자기 영광을 위한 내용과는 달리 이복형들의 생명 보존과 그 후손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활용됐다고 고백하고 있음이 보이는가? 이게 바로 '구속과 섭리의 관점'에서 만사를 해석할 줄 아는 이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기업가 중에서 가장 존경받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 박사가 남긴 격언은 모든 이의 가슴에 새겨둘 가치가 있다.

[11]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김종원, 『사색이 자본이다』 (사람in, 2015), 42)
길을 찾지 못해 절망에 빠진 존 스튜어트 밀을 구원시켜준 프랑스의 작가 마르몽텔의 회고록 내용이 기억나는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참 행복자는 자신의 행복이 아닌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12] 성경에도 그와 흡사한 구절이 있다. 빌 2:3-4절 말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이들의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이가 참 기쁨과 행복자요 타인에게도 기쁨을 충만케 해주는 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13] 하지만 아무나 이타적인 행복자가 될 순 없다. 비결은 5절에 나와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면 가능하다.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주변 이웃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이롭게 하는 참 행복자로 살아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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