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e Human - Mere Christianity C. S. 루이스 저,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Mere Human에서 Mere Christianity를 추출하다.

 

C. S. 루이스 저,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를 읽고.

 

유쾌하진 않겠지만, 누군가 비난할 때를 한 번 떠올려 봅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누군가를 비난할 때면 상대방도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여기는 어떤 기준에 호소하게 됩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수치심이나 굴욕감을 느끼게 하거나 자신의 그름을 스스로 시인하길 원할 때, 우린 보통 '비난'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곤 하지요. 이렇게 비난받아 마땅하다거나 혹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개인 및 집단의 행동, 그리고 인간 및 사회 전체가 불의하다거나 악하다고 여기게 되는 이유까지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어떤 법칙 혹은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일정한 방식이 경험이나 교육에 선행하여, 그리고 본능의 차원도 훌쩍 넘어서는 단계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둡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어두움에만 있을 때에는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그것이 어떻게 혹은 언제부터인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도덕적 판단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법칙을 '자연법' 혹은 '도덕률'이라고 하는데요. 이 책에서 루이스는 이를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법칙을 어쨌거나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지요.

 

루이스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비록 모든 인간이 옳고 그름에 대한 우주적인 행동 법칙을 안다고는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그런 기준이 옳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는 근원적인 숙명 (이 책의 제목을 흉내 내어, 'Mere Human'이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이 책은 루이스가 이러한 'Mere Human'에서 'Mere Christianity'를 이끌어내는 변증을 시도하는 책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간파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루이스는 바로 이 두 가지 (도덕률을 알지만, 행하지 못하는 인간)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법칙의 배후에는 인간의 문제를 넘어 인간뿐 아니라 우주를 지휘하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합리적인 추론을 기독교적인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명쾌하게 이끌어냅니다. 루이스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죠. 여기서 독자인 저는 기독교의 도움 없이 우리 개개인의 힘으로 이 배후의 존재에 대해 숙고해보도록 유도하고 있는 루이스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섣불리 그 배후의 존재가 기독교의 하나님이라고 단정 짓지 않습니다. 그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는데요. 루이스는 그 배후의 존재가 그름이 아닌 옳음을 원하고 명령하는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그 존재가 선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내며, 인간들이 그러한 법칙을 알면서도 자꾸만 그름을 선택하고 행하는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로부터 그 존재가 인격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용서는 인격을 가진 존재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루이스는 말합니다. 바로 그 선하고 인격적인 존재가 우주를 만들고 앞서 말한 도덕률의 배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는 기독교가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힘주어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먼저 도덕률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여러분이 그 법을 어김으로써 그 힘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기 전에는,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루이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천국 티켓을 확보하는 안전한 보험과도 같은 용도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책 '하나님의 모략'에서 언급했던 '바코드 신앙'에 사로잡힌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맹목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무속신앙과 자본주의와 나르시시즘의 교묘한 결합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있는 21세기에 우리는 루이스의 이러한 날카로운 변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이성은 대립하는 상대가 아닌 조화를 이루며 더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한 기독교인의 필수 요소일 테니까요.

 

이 책, '순전한 기독교'는 본래 2차 세계대전 중 방송되었던 라디오 강연 원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짧은 제한 시간 내에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지엽적인 설명은 다 삭제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비유와 상징에 능한 루이스의 필체가 다른 책에서보다 이 책에서 더욱 간결하고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 인상을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목만 봐선 이 책의 내용을 짐작하기가 쉽진 않을 것입니다. 제목에서 등장한 '순전한'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머리말에 써진 루이스의 친절한 설명을 읽은 후에야 그 뜻을 알게 되었답니다. 루이스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래, 믿지 않는 이웃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상의 봉사는 모든 시대에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 온 바를 설명하고 수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의 종교'를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한' 기독교, 즉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기독교의 '공통적인', 또는 '중심적인', 또는 '순전한' 기독교를 제시하는 작업이 바로 이 책을 통해 루이스가 시도하고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교단이나 교파, 역사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기독교를 바로 '순전한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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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운 변증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용어로 쓰여있기 때문에 루이스가 시도하고 있는 작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Mere Human에서 Mere Christianity를 이끌어내는 변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이 책에서의 루이스의 시도가 정말 탁월하다는 것을 저는 다시 한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선하고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의 필연적 존재를 성경이나 교회의 도움 없이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로 추론해낼 수 있다는 점은 정말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의 1부를 다뤘는데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 부분이 바로 이 책을 기독교인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지속적인 사랑을 받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의 2부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범신론과 기독교를 비교하며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원론과 기독교를 비교하며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이를 잘못 사용한 반역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하여 하나씩 짚어가면서 말이지요.

 

이어지는 3부에서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이야기하면서 도덕을 강조합니다. 개인 도덕은 물론이며 그것을 넘어 사회도덕까지 확장되는 흐름을 이야기하는데요. 복음의 공공성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저에게는 읽혔습니다. 루이스는 이러한 도덕에는 7가지 덕목 (4가지 기본 덕목: 분별력, 절제, 정의, 꿋꿋함 / 3가지 신학적 덕목: 사랑, 소망,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이것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나갑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정한 인격적 특질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의 핵심은, 이러한 특질이 그 내면에서 싹조차 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외부 조건이 좋은 곳도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 즉 그들은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그 깊고도 강하며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3부에는 기본 덕목 말고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장 큰 죄', 즉 가장 핵심적이자 궁극적인 악이 바로 '교만'이라고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교만은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는 악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의 의미를 교만에서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마지막 4부에서는 다분히 신학적인 내용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이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부분이지요. 그러나 루이스는 일반 독자들도 만약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면,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하고 정확한 개념들을 알고 싶을 거라면서, 지도와도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신학을 일부러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넣었다고 4부의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주로 삼위일체에 대한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데요. 루이스의 의도는 아직 그 누구도 명확하고 정확하게 설명한 적이 없는 삼위일체를 비그리스도인에게 처음으로 자기가 설명해보겠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루이스의 강조점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기독교의 핵심, 즉 새 사람으로 되는 신비한 과정,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의 거듭남과 성숙함에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 되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신 사건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 '창조된 존재에서 태어난 존재로 변화되는 일', '일시적인 생물학적 생명에서 시간을 초월한 영적 생명으로 바뀌는 일'로 해석합니다.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는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다'는 말의 뜻을 숙고해보며 루이스의 해석을 받아들일 때, 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루이스는 새 사람이 되는 일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변형임을 강조합니다. 또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이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린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고도 역설합니다. 자아를 포기할 때 발견할 것이고, 생명을 버릴 때 얻을 것이며, 죽음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생명을 발견할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육신의 죽음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새롭고 온전하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저는 이 책을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상관없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나갈 준비가 된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책을 사심 없이 진지하게 읽게 된다면, 아마도 루이스의 자연스럽고도 강력한 논리에 이끌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거나,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기독교를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리라 저는 감히 예상합니다. 또한 이미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이 책을 겸손한 마음으로 찬찬히 읽게 된다면, 아마도 이성과 믿음의 균형에 대한 관점에서 기독교를 더욱 진지하게 이해하고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언하고 싶은 것은, 루이스의 비유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큰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먼저 큰 맥락을 견지한 상태에서 루이스의 탁월한 비유를 즐기며 도움을 받으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루이스는 여러분의 더할 나위 없는 벗이자 스승이 기꺼이 되어줄 것입니다.

 

#김영웅의책과일상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