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한국형 좀비 학원물, <지금 우리 학교는>.
◈좀비와 바이러스: <나는 전설이다>로 정형화된 대중문화 속 좀비
넷플릭스 새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이 1월 28일(오는 금요일) 공개된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된 동명의 웹툰을 실사화한 작품이다.
연재 당시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웹툰 서사를 영상으로 옮긴 작품이라 세간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고 있다.
드라마의 장르는 좀비 스릴러이다. 기존에 영화 쪽으로는 <부산행>이,
그리고 드라마 쪽으로는 <킹덤>이 한국형 좀비물로 흥행몰이에 성공한 적이 있는 만큼, 장르를 고려한 흥행 기대감도 상당하다.
작품의 배경이 특이한데, 수도권의 한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좀비 바이러스 확산 발원지가 고등학교 과학실로 설정되어 있다.
원작 웹툰 연재 당시 독자들의 연령대가 주로 10대와 20대에 편중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학원물과 좀비물의 적절한 조합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약 1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는 국내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 즉 현저한 저출산 및 빠른 고령화로 인해
청소년들의 현실을 다룬 학원물에 대한 관심이 미디어 시장에서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학교는>이 <오징어 게임> 수준의 파급력을 가진 흥행 성적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넷플릭스에서 투자를 한 작품이고, 그간 한국형 좀비물이 아시아 시장에서 준수한 흥행 성적을 거둬온 점 때문에,
상당한 기대감을 모으고 있기는 하다.
이전 <반도>에 대한 평론에서 논한 바 있듯, 좀비란 카리브해로 팔려온 서아프리카 노예들이 발전시킨 샤머니즘 종교문화의 산물이다.
아이티를 중심으로 발흥한 부두교 신앙에서 좀비란 주술사가 정신을 조작해 백치 상태로 만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주술적 개념에 미국의 기독교적 부활 신앙이 혼합되어 탄생한 대중문화 소재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좀비의 이미지이다.
이 좀비라는 소재에 바이러스를 접목한 작품의 대부 격으로는 미국의 작가 리처드 매드슨이 1954년에 발표한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인류가 좀비가 되어 멸망한 원인은 핵전쟁으로 생겨난 변종 박테리아였다.
이로써 대중문화 속에서 좀비와 미생물의 본격적인 결합이 시작되는데, 이런 경향은 1996년 발매된 캡콤의 비디오 게임 <바이오 하자드>의 흥행과
2002년 개봉된 좀비 영화 <레지던트 이블>, <28일 후> 등을 통해 좀비물의 공식으로 자리잡게 된다.
좀비 스릴러 영화나 드라마의 매력 포인트는 죽음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하는 데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자극하는 데 있다.
원래 아이티 부두교에서 좀비화(化)란 개개인에게 저주를 내리는 주술 개념이었을 뿐, 병처럼 확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와 1968년 개봉된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설정 덕분에,
좀비도 뱀파이어처럼 물리면 똑같이 좀비가 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
애초 <나는 전설이다>에서 좀비화된 이들의 상태가 거의 뱀파이어처럼 묘사된 것을 보면,
오늘날의 좀비물에는 뱀파이어 전설의 영향도 뒤섞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지 로메로 감독의 좀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
◈좀비와 기독교 신학: 죽음, 부활, 영혼에 대한 신학적 가르침의 왜곡
고대 서구 문화권에서 죽은 몸의 부활이라는 개념은 그리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예외적으로 고대 이집트 종교에는 죽은 몸의 부활 개념이 있었다.
이집트 <사자의 서>는 살아생전 지은 죄의 무게를 담은 인간의 심장을 저울에 달았을 때
여신 마트의 깃털보다 무겁지 않으면 보상으로 몸의 부활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신화의 경우 부활보다는 영혼의 환생이라는 개념이 내세관을 지배한다.
환생이란 영혼은 그대로이되, 아예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 종교 고유의 정령신앙, 즉 물활론(Hylozoism)의 핵심에 자리잡은 믿음이다.
훗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물활론적 환생 이론을 인간과 동물, 그리고 사물의 존재 원리를 설명하는 데 적용한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이데아로부터 반복적으로 이탈해서 현상계에 육화되는 것을 환생이라고 보았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 부여한 목적인(因)에 따라 육체에 깃들어 생물의 존재를 완성시켜가는 힘을 영혼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의 죽음으로 해당 생물의 영혼은 소멸되되 그 완성에 이른 존재의 발자취인 현실화의 궤적은
신에게로 다시 회수되어 향후 세계의 현실태로 종합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주후 1세기경 기독교가 서구 각지로 전파되면서 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서구의 내세관을 주도하게 된다.
이에 따라 기존의 철학적 죽음 이해도 새롭게 수정, 발전되는데, 플라톤의 영혼에 관한 이론은 4-5세기경 어거스틴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은 13세기경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재구성된다.
▲<지금 우리 학교는>의 한 장면. 오늘날 대중문화 속에 정형화된 좀비의 이미지와 특성은
기독교 신학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거스틴은 환생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은 부정하면서도, 영혼이 이데아와 같이 순수하게 관념적이고 영적 상위의 차원에서 왔다는 교설은 받아들였다.
이에 어거스틴은 영혼이 몸의 죽음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으며,
이 영혼에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죽은 몸 또한 되살아난다고 가르쳤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운 영혼의 소멸에 대한 가르침은 부정하면서도,
몸이 죽었을 때 영혼 또한 활동이 중단된다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인간의 육체가 죽은 상태에서는 영혼이 마치 소멸되듯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있다가
부활 때 육체의 부활과 함께 영혼의 기능이 온전하게 회복된다고 가르쳤다.
이렇듯 중세 기독교 신학은 인간의 육체가 죽었을 때 영혼의 상태와 부활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상이한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이 두 갈래의 서로 다른 믿음은 이후 여러 모양새로 발전되어
기독교 신학 역사 속에 전해지게 된다.
오늘날 대중문화 속 좀비에 대한 묘사 가운데는 육체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혼의 기능에 대한
이 두 방향의 기독교적 가르침이 기괴하게 비틀린 채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우선 좀비 바이러스가 침투했을 때 원래 가지고 있던 정상적 생체 기능이 완전하게 붕괴되는 단계는
땅에 속한 인간 육체의 죽음에 대응된다.
다음으로 원래 인간으로서 갖고 있던 지성과 인격이 완벽하게 소멸되는 점은
몸의 죽음과 함께 영혼의 활동이 멈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식의 죽음 이해를 반영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기존 인간의 생체 기능과 지성, 인격이 모조리 무너진 채 몸이 썩어가면서도 움직이는 상태는
플라톤-어거스틴 식의 죽음 이해, 즉 몸이 죽어도 영혼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한다는 믿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처럼 오늘날 대중문화 속에 정형화된 좀비의 이미지와 특성은 기독교 신학의 죽음, 부활, 그리고 영혼의 상태에 대한 가르침을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모양새로 비틀어 놓은 왜곡의 산물로 보인다. <계속>
▲<지금 우리 학교는>의 한 장면. 기독교 신학의 죽음과 부활, 영혼에 대한 가르침을 기괴하게 왜곡한 좀비를 중심 소재로 삼은 학원 드라마.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