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로마서 10:9)
바울은 사순절에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신앙의필수조건들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세 예수를 따르기 위한 두 가지의 필수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주님임' 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입술로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으로 그것을 믿으십시오.
하지만 이 고백은 우리가 축적해 온 온갖 권위주의의 꾸러미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권력, 제도, 우리의 신분이나 우리의 국가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 대한 충성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렵지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켰다'는 부활의 증언을 믿으십시오.
사수널은 부활절에 이르는 길 위의 시간입니다. 여기서 육체적 부활이냐 영적 부활이냐, 역사적 실재주의냐 은유냐에 대한 토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음의 상태에 두지 못했고 또 둘 수도 없었다는 증언이 부활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하나님께서 죽음의 체계를 깨뜨리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선포는 단순히 소생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현실에 대한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은 두려움이나 폭력이나 특권에 의해 제약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선포에 대해 열정을 다하였습니다.
부활의 새로운 현실은 인간의 그 어던 설명도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새로운 현실을 여시는 살아계신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바울위 선포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고 깊고 결정적인 확신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는 만유의 주재이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대하신 분'입니다.
부활의 세상을 규정하는 상징은 우리의 필요와 바람과 희망을 넘어서는 '신적이고 우주적인 관용'입니다.
바로 이 관용이 우리에게 모든 좋은 은사, 가장 놀라운 새로운 가능성의 선물을 가져다 줍니다.
그곳에는 그어떤 계급 구조도 없습니다. 그 어떤 예외적인 소유권이나 자격도 없습니다.
버스 뒤에 무임 승차할 수 있는 특권이나 이방인들, 여성이나 보수주의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이나 동성애자들, 그 누구도 결코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새로운 관용을 가져오십니다. 이 관용은 하나님 자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교회를 불러 이 관용에 참여하라고 하십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세상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당신의 관용으로 우리를 이끄소서.
우리가 부활의 주님과 함께 타자들을 향해 새로운 생명을 형한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윌터 브루그만과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집(가 보지 않은 길)
그렇게 될 때 우리가 선호하는 온갖 구별과 경계는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