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
16그러므로 너를 먹는 모든 자는 잡아먹힐 것이며 네 모든 대적은 사로잡혀 갈 것이고 너에게서 탈취해 간 자는 탈취를 당할 것이며
너에게서 노략질한 모든 자는 노략물이 되리라 (예레미야 30:15-16)
성경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고통에 빠졌다가 기쁨을 얻는 이야기, 상실을 겪었다가 선물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슬픔 가운데 길을 잃었다가 안녕히 집으로 귀환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성금요일과
부활의 새생명의 기적을 경험하는 주일의 이야기에 빗대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우리의 관심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매순간마다 죽음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 나오기를 반복하며 동일한 이야기를 살아 냅니다.
교회는 우리들의 죽음과 절망과 새 생명의 회복의 의미를 나누는 곳입니다.
세상에서는 너무 나쁘거나 너무 냉소적이거나 너무 불안하거나, 부정할 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희망을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은 '계시'라고 할 만합니다. 본문의 시는 사랑하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한 도시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은 상처의 두께, 깊이, 모순, 고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천방지축의 어린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의 행동을 무조건 수용해 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이긴다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사랑이 이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시 속에 풍성히 녹아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외'를 뚫고 '고통'의 침묵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치유되는 '새로움'으로 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 날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예레미야에서 패배하고 추방되고 회복되는 예루살렘의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 성금요일에 버림받고 토요일에 죽음의 심연으로 들어가 주일에 부활을 위해 준비하시눈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글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읽어 가도록 도와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시인의 책임은 기록한 그 시를 설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시인은 열어 보여 주어 그 순간까지 무엇을 보지 못했고, 말하지 못했는지 알려 주셔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인 것은 피할 수없는 상실의 시기가 있지만 그 너머에 희망이 있으며, 그 사이에는 싶은 성찰의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변혁시키는 하나님, 우리의 상실과 우리의 소망 가운데 함께하소서.
우리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우리 성찰을 줄이지 않으며 신실하게 머물수 있기를.
우리의 안일한 소망에 저항하며 당신을 기다리를 소망합니다. 아멘.
-윌터브루그만과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집(가 보지 않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