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정의 마임?마임! - 삭개오

 

오래전 서울의 어느 유력한 수양관에서 매년 시설에 있는 청소년들을 초대해 캠프를 열어 준다고 했다.

그 수양관과 함께 그 캠프를 주관했던 캠프전문사역팀 ‘행복한 마을’의 섭외로 나는 마임 순서를 맡았고, 그 시간에 새로운 마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실한 동역자인 당시 조은성전도사(지금은 목사님이다)와 함께 의논하고, 조전도사는 ‘삭개오’라는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삭개오’는 성경 누가복음에 소개되고 있다. 성경에는 ‘삭개오’가 키가 작은 부자 세리장이었다는라는 것,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나무위로 올라갔고,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만나주셨다는 것,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회심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이 사실에 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깊던 조은성전도사는 배경을 붙였다. ‘삭개오’는 성경의 기록을 넘어 조심스럽지만, 우리 주변에 있을법한 사람이 되었다.

 

삭개오를 우리 주변에 있을법한 사람으로 만든 배경은 이렇다.

삭개오를 ‘왕따’(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왕따 문제는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로 설정해 그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이유를 만든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고, 별로 잘난 것이 없었던 삭개오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또래에서 잘 어울리지 못한 채 공부는 열심히 해서 세리가 된다는 것,

그러나 그의 직업은 사람들과 더욱 친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듯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며 부자는 되었지만,

그의 삶은 공허함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는 것이 우리가 만들고, 동의한 삭개오의 배경이다.

그렇게 해서 죄인 삭개오 보다는 상처 입은 외로운 삭개오가 만들어졌다. 분명 삭개오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삭개오를 미워하시거나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외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삭개오의 인생을 이해하셨고, 그의 외로움을 보셨고, 죄인이라고 늘 외면당하던 그에게 다가와 이름을 불러주셨다.

함께 먹고, 자고, 얘기 나눠주셨다. 사실 우리는 다 삭개오와 같다.

우리에겐 모두 상처가 있고, 슬픔이 있고, 외면당한 아픔이 있으며, 이런 것들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

욕심만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러한 점이 당시 수양관에 모였던 그 아이들과도 통했던 것 같다.

공연 전 내가 봤던 그 아이들은 제법 건장한 상남자의 향기(?^^)를 풍겼고,

마치 서로서로 나는 이정도로 세다(strong)고 내기를 하는 아이들처럼 껄렁껄렁함이 몸에 입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이 아이들이 마임을 잘 봐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염려와는 달리 나는 엄청난 것을 경험했다.

겉모습만 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센척하던 남자 아이들의 눈물…

‘삭개오’를 보는 동안 아이들은 함께 울었다. 나는 그 때 왜 우리 같은 사역자들이 마임을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춰야하는지 명확히 깨달았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또 연약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들인 것이다.

울고 있지만, 아프지만 슬프다고 아프다고 말조차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모든 사역은 기도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마임‘삭개오’를 통해 13년간 많은 곳에서 많은 일을 하셨고, 많은 은혜를 주셨다.

이 귀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며, 나 역시 늘 은혜 속에 행복했다.

삭개오를 소개하는 이 시점에서 이 놀라운 일에 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사용하여 주시는지 이 경이로운 은혜를 밝히고, 감사하지 않을 수 가 없다. 

‘삭개오’는 음악도 수작이고, 마임도 걸리는 곳 없이 편안하게 잘 진행되는 좋은 작품이다.

나에게 모든 작품이 소중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조인정, 조은성)를 사용하시는 동안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 작품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연히 ‘삭개오’이다.

 또 너무 고마운 것이 테크닉적으로 크게 어려운 부분도 없으면서, 자신의 감성대로만 잘 풀어낸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작퓸이라는 점이다.

‘삭개오’는 인간의 아픔, 외로움, 공허함,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상처에 하늘위에 멀리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앞에 실제적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여준다.

나는 이 귀한 마임‘삭개오’가 필요한 곳에 더욱 많이 사용되어지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