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둘 때에
(요한복음 20:1 상)
얼마나 오랫동안 토요일이 지속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토요일이 끝나기는 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토요일이 지속될지그것이 끝나기는 할 지 아무도 모릅니다.
토요일은 고요함과 으심과 절망의 중간에 끼인, 죽음과도 같이 고요히 시간에 서 있는 날입니다.
첫 십자가의 토요일, 그날은 그렇게 방임과 낙담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진 모든 토요일. 그날들은 두려움과 확대, 전쟁과 인종학살이 난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방구를 찾을 수 없는 무자비한 실패의 토요일들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 절망적인 고요함 중에 교회는 자신들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새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 다른 이야기의 핵심 등장인물은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제거한 금요일의 사나이입니다.
통치자들은 토요일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전혀 그들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금요일의 사나이에 관한 이 기적의 이야기는 토요일 그리 길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일요일의 사나이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는 좋은 옷을 걸치고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행동을 한다거나 경건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주의 첫날에, 새 세상의 첫날에,
함께한 사람들을 위해서, 새생명의 첫날의 사나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일요일의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긴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과 권력과 폭력과 통제의 옛 이야기들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다른 방식의 삶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놀아운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다시 시작하는 그 사나이를 따르는 '제자도'입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 안에서 우리 모두는 보수주의자이건 진보주의자이건 제자 사역에 경이로움을 느낄 뿐입니다.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의 끝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사방 받을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위험에 처할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주는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금요일의 기억과 주일의 소망의 흔적을 가지고 있으나
불안과 초조 속에 토요일을 보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어두움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게 하소서.
생명을 주는 주의 은혜가 우리 기다림을 방해할 때까지 우리가 기다릴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윌터브루그만과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집(가 보지 않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