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 “다 이루었다”
교회오빠 다큐멘터리에 고 이관희 집사의 고백이 나온다.
“왜 하루라도 더 살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하루라도 더 온전하고 성숙한 하루를 살 기회이기에. 그게 삶의 이유니까.”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신학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신학도 부질없을 때가 많다. 나 역시 내 안의 우상들을 치우지 못하면서, 처절한 싸움에 눈앞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 허덕이는 이들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라",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허망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슴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신앙의 최고봉은 “고난이 복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신앙의 진실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고통은 뜻이 있고, 인간은 모두 죄인이니,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견디고 해쳐나가면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욥의 친구들의 위로와 권면, 질타, 신앙의 능력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욥은 자신이 끝없는 고통을 당해보니 알게 되었다.
고통이 심해지자, 욥은 초반부의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이도 여호와시오니” 모든 것을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겠다는 자신의 고백을 멈추었다(욥 1:21). 그는 고통가운데 감사거리를 찾는 것도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조차 외면하고 자신의 신뢰를 저버린 하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기에 욥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과연 내가 아는 하나님이 맞는가? 그제서야 그는 신앙의 진실을 만난다.
참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예배와 고백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욥은 “엘리엘리사막다니”의 여정에 든 것이다. 이는 가장 고귀한 상태의 고백이다. 욥의 친구들의 권면은 모두 기존의 신앙관을 대변한다. 그것들은 보통의 경우 대단히 훌륭하다. 그러나 틀린 것이 아닐지라도 끝없이 고통당하는 이들에겐 한계가 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그의 임재가 욥에게 모든 의문을 멈추게 했다. 복음의 가장 큰 영성은 선과 악, 평안과 고통, 삶과 죽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 “다 괜찮다”라는 진실을 가슴으로 아는 것이다.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시니 나의 죽음도 유익하다는 고백이 가슴에서 흘러나오게 하소서. “엘리엘리 라마 사막다니”의 절규와 “다 이루었다”라는 고백은 모순이 아니다. 이 주님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소서!
고통 가운데 원망과 수용의 능력은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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