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요한복음 9장 25b)
말씀에서 유대 종교 당사자들과 비로소 보게 된 사람 사이의 대치는 하나의 극적인 상황을 연출합니다. 이 대치의 한 쪽에는 '기성 체제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대답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만하면서 모든 것의 자리를 정하려고 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가지고 있는 권리를 공고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에 반해 다른 한쪽에는 예수님과 그의 사람들에 의한 '새롭고 설명할 수 없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 우리 스스로를 이 위대한 드라마의 참여자로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는 그를 따르는 새로운 생명을 지닌 사람들과 그를 거부하는 옛 진리의 옹호자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각각 예수님에 대해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눈이 먼 채로 사는 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과 옛 진리의 통제 앞에 옛 진리의 통제 앞에 서 있습니다. 안식일 규제와 같은 통제적인 옛 진리는 많은 형식을 취합니다.
그것은 특권과 권력과 통제의 옛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안정된 교회 정통주의의 옛 진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종 , 계급, 그리고 젠더에 따른 특권의 옛 진리에 맞서서 서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의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명으로 옮겨진 자신의 새로운 육체적 상태를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삶의 방식으로의 초대요, 기회요,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감사들 드리며, 순종하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외칩니다.
내가 바로 과거에 눈멀었던 그 사람입니다. 설명할 길이 없지만 더 역시 시력을 돌려받았습니다.
우리는 더욱 분명히 봅니다. 이제 우리는 보게 해주신 그분을 더욱 친밀하게 느끼고 사랑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보게 하면서 그분을 따릅니다.
분명히, 친밀히, 가까이 다가갑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진리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복된 삶을 세상 속으로 불어 넣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도우소서. 아멘.
윌터 브루그만과 함께 하는 사순절 묵상집(가 보지 않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