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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박사 “목사님들께 이 이야기 꼭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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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을 듣고 있는 참석자들.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는 대담 마지막 무렵 “목사님들께 이 이야기를 꼭 해 주고 싶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달리다굼’ 하시며 죽은 소녀를 살리신 후, 예수님의 첫 마디는 “이 아이가 살아났다”가 아니었다. “얘 먹을 것 좀 갖다줘라”. 살려놓고 하시는 말씀이 마치 우리 곁의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참 감동적이지 않나?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지, 먹을 것은 우리가 줘야 한다. 이게 일상사의 우리 슬픔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면서, ‘먹을 것’은 너희들 소관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먹을 것을 갖다주실 것을 자꾸 얘기한다. 한참 틀렸다.

하나님은 먹을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러 오셨지, ‘아침 저녁 빵’ 주러 오시지 않았다. 그 전능하신 분이 아이를 이왕 살렸는데 뚝딱 샌드위치 만들어 내서 이거 먹어라, 하지 않으셨다. 이건 우리가 할 일이다. 하나님 아들로서 생명을 살리시는 엄청난 하늘의 권능을 행하신 후에는, 정말 인자한 동네 노인처럼 말씀하신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 후, 왜 이 중요하지 않은 말을 적어 놓았을까. 하나는 번역될 수 없는 말이고, 하나는 어느 나라 말로도, 백 번 천 번도 번역이 가능한 말이다. 여기서만은 ‘빵’이라 하지 않고 어느 나라에서도 쓸 수 있는 ‘먹을 것’이라 하셨다.

 

우리가 영성이니 지성이니 여러 말 하지만, 세 끼 밥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일상사, 밥 먹는 우리 소임을 다했을 때 하나님이 빛을 주신다. 일상사까지 하나님께서 하시지는 않는다. 이거 하러 오신 분도 아니다. ‘달리다굼’에 대해 많이 설교하시지만, 저에게는 ‘밥 줘라’ 하시는 말씀이 더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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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철 목사.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재철 목사는 “2000년 전 일상의 언어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듯 우리 일상의 언어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래서 특별한 언어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매일 주고받는 일상의 말을 통해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는 주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의미있는 시간이었으리라 믿는다”며 “그런 의미에서 다음 달에는 예수와 빵에 대한 대담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하나님 말씀 얼마나 굴절됐나… 언어의 감옥에서 나오라

당시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한지 오랜 후였기 때문에 히브리어도 제대로 몰랐다. 그리스말, 그것도 팔레스타인 지역 변방 사투리로 고쳐줘야 성경도 읽을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성경이 엉망진창이 됐다. 너무나 많은 하나님 말씀이 인간에 의해 훼손되고 오해되는 게 많다. 지각을 넘은 세계라고 했는데,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이라고 쓰여있다. 우리가 같은 지각을 넘어서서 찬양받으시는 분 아닌가?

성경을 한 장만 읽어도 한 마디만 하나님 말씀이고 다음은 전부 비유다. 여러 말이 섞여 있어서 당시 풍습을 모르면 오해할 말들도 많다. 얼마나 하나님 말씀이 굴절돼 왔나. 얼마나 많은 경로로 잘못 전달됐나. 그걸 찾아주는 게 우리의 기도이자 찬송이 돼야 한다. 맹목적으로 하다 보면 마귀 밥 되기 쉽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모든 말에 현혹되지 말자. 말 너머에 있는, 개념과 감각까지 뛰어넘은 그곳에 신이 현신한다. 인간의 개념과 감각은, 기호는 절대 해체되지 않는다. 불교만 해도 불립문자, 언어의 감옥에서 나오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언어를 감옥이라 한다. ‘프리즌 브레이크’ 하라… 너희는 모두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고, 법칙화된 구조 속에 들어있다.

 

그래도 달리다굼이니 아멘이니 몇 마디 아람어들이 살아남았다. 그러니까 이러한 말들이 대단한 것이다. 뜻도 모르고 의미가 없으니 뭔가 나올 것 같다. 언어의 자유, 의미에서 자유로워진다. 시에서 주로 쓰는 기법이고, 문학은 아예 그걸 전공으로 한다. 성경은 일단 문학적으로 읽고 신학적으로 읽되, 신학과 종교마저도 버려야 하나님 음성이 들린다.

 

1차 독해부터… 너무 복잡한 해석은 자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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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박사. ⓒ양화진문화원 제공

 

이어령 박사는 “세계 역사상 하나님이 계신 교회에서 기호학을 놓고 목사님과 얘기하는 건 오늘이 처음 아닐까”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제언도 했다.

 

들어보시면 알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계시지 않고, 신학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와 정신을 함께 입고 세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되어서 지상의 언어에 하늘의 의미가 들어왔을 때 천국 가는 교통신호를 볼 수 있다.

정말 천국에 가고 싶다면, 천국 가는 신호등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거기에는 성경이라는 기막힌 신호등이 있는데, 우리가 기호학을 몰라서 이제까지 뜻을 몰랐다. 하나님 말씀은 개념적인데, 예수님의 몸에서 육화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의 미디어로서 알게 됐다.

 

예수님은 당시 신학 지식을 모르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 창기, 어린아이들에게 말씀하셨다. 깊은 뜻을 모른다고 복음을 못 읽는 게 아니다. 얼마든지 2차, 3차로 성경을 읽을 수 있지만, 먼저 1차 해독이 참 중요하다. 세속적인 1차 해독에서 문학적·종교적으로 나가야 한다. 1차 해독부터 쭉 올라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단순한 텍스트 분석이 아니라 상황 분석 내지 배경, 문화까지 파고 들어가는데, 너무 파니 성경을 왜곡하게 된다. 아니면 너무 겉만 보거나. 둘 사이에 긴장관계가 있어야 한다. 성경을 어린애처럼, 수능시험 공부하는 학생들처럼 읽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강도 만난 자를 왜 도와주지 않았는가 하는 해석을 보자. 당시 부상자는 율법적으로는 부정한 사람이었는데, 예루살렘에서 성스러운 몸으로 다 정화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만지면 큰일이 나는 것이었다. 생명을 사랑하기 위해 형식이 나온건데, 형식주의에 얽매였던 것이다. 본질은 놔둔 채 겉만 따지는 사람들이다.

 

이 바리새인, 율법사들이 바로 교조주의자들이고 생명 사랑이라는 본질을 놔둔 사람들인데, 이렇게 해석하면 이 사람들이 정당화돼 버린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 때문에 그냥 지나간 것이고, 이 사마리아인은 생명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서 도와준 게 된다. 엉뚱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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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람 앞에 사랑을 가진 사람이 이웃이고, 안 가진 사람은 이웃이 아니다. 이 정도만 알자. 너무 복잡하게 얘기하면 사랑 얘기가 아니라 규율 문제가 되고 복잡해진다. ‘네 이웃이 누구이냐’ 할 때 시험하려고 한 얘기니까, 율법이고 뭐고 잔소리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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