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래함이 보여준 ‘겸손’, 그 네 가지 측면
빌리 그래함이 보여준 ‘겸손’, 그 네 가지 측면
1. 자신의 실수를 기꺼이 인정하다
2.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다
3. 받은 은혜에 감사하다
4. 부르심에 순종하다
▲과거 한국을 찾은 빌리 그래함과 한경직 목사. ⓒC채널
우리에게는 어른이 필요하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거목이 절실하다.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은 우리에게 결여되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른은 신뢰에 부합하는 여러 면모가 갖추어져야 한다. 물론 그 중 성품 부분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또한 그와 더불어 삶의 일관성이랄까, 통전성 같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할 것이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호명(呼名)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두 가지 면에서 그는 한결같은 올곧은 모습을 지켜왔다.
물론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이, 빌리 그래함 또한 단점과 약점이 있다. 가령 대표적인 단점으로 꼽히는 게 미국 대통령과의 일관된 관계이다. 이것이 언제나 좋은 모습으로만 드러난 건 아니지만, 무조건 나쁘게 치부할 수만은 없다. 권세자를 대하는 바울의 태도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점은 그의 인간성 자체이다.
빌리 그래함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 다층적 면모로 인해 그의 인간성을 온전히 평가하는 데에 어려울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시간적 거리가 확보된 상태다.
바로 그런, 근래 출간된 그의 전기 『빌리 그래함』을 소개하고 싶다. 그랜트 왜커(Grant Albert Wacker)라는 교회사가의 오랜 연구가 집약된 노작(勞作)으로, 그래함의 명과 암을 균형 있게 조명한다.
여러 흥미로운 대목(가령 존슨 대통령 등과 더불어 벌거벗은 채로 백악관 수영장에서 헤엄쳤다거나)이 많지만, 64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정리하는 결론(‘그래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이 특히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래함은 겸손한 사람이다. 숱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방대한 본문을 다 읽고 나면, 이 결론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빌리 그래함은 여러 모로 복합적인 인물이다. 겸손의 부분도 그러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자신이 잘 모르는 영역에서도 거침없이 입을 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래함은 본질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의 적대자들조차 이 부분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했다.
물론 왜커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결코 겸손의 완벽한 본보기가 아니었다. 가령 유명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태도를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완전한 겸손 자체가 비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겸손은 자기 비하나 굴종을 겸손으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올바른 겸손은 건강한 자기 확신을 기초로 한다.
왜커는 그래함의 겸손을 “자신의 실수를 기꺼이 인정하려는 모습, 자기 자신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모습,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습” 등 네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앞의 두 가지만 주목해 보자. 실제로 그래함은 여러 실수를 저질렀고, 어떤 실수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했다. 모호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사과했다.
실수는 누구나 저지른다. 하지만 그 실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과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그처럼 명성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 부분은 곧 두 번째 항목과 연결된다.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겠지만, 그는 한 면으로는 자신의 유명세를 즐겼지만, 다른 한 면으로 자신의 에고와 영향력을 넓히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겸손한 사람이다.
사실 나는 원래 빌리 그래함을 잘 몰랐다. 거의 관심이 없었다. 비판적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의 복잡한 면모에 대해 알게 된 후로, 외려 그의 성숙한 인격이 내 마음에 깊이 인상을 남긴다.
그렇다. 성숙한 인격이다. 그랜트 왜커의 전기를 읽고서,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이게 바로 진정한 어른이구나 싶었다.
그 역시 인간이기에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지만, 그래함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곁에 그와 더불어 머물고 싶지 않을까?
설혹 그의 신학이나 그의 설교에는 관심이 없더라도, 그와 함께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치유의 힘을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
어느 역사가는 말하길,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길 건너는 정도의 수고도 들일 생각이 없지만, 그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만 있다면 눈 내리는 속에서 1km 거리라도 기꺼이 갈 것이라고 했다. 자신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바로 이 부분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 어른이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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