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 이야기를 통해 보는 다름의 미학]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널리 알려졌다.
인문학 강의에서도 종종 언급되기에 불신자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수 있다.
어떤 선교학자가 각 나라 사람에게 탕자 이야기를 들려주고 ‘탕자는 왜 굶주리게 되었을까?’질문하였다.
미국 사람들은 한결같이 탕자가 재산을 낭비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러시아 사람들은 흉년이 들어서라고 대답하였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주는 사람이 없어서 굶주렸다고 하였다.
왜 같은 질문에 사람마다 다르게 답을 할까?
성경은 이렇게 답하였다.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그가 배룰 채우고자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15:13-15)
성경에는 세 나라 사람의 대답이 다 들어 있다.
사람들은 나고 자라면서 받은 사회적, 문화적 영향 그대로 체질화 된다. 내가 갇힌 문화의 창을 통해 사람을 보고 세상을 해석한다.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환경에서 자란 미국인은 삶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본다.
경제를 자기가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잘 살 수도 있고 못 살 수도 있다.
탕자는 명백히 재산 운용에 실패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미국인은 탕자가 굶주리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조금 다르다.
러시아는 추운 계절이 길어서 농사짓기에 매우 까다롭다.
날씨만 추운 것이 아니라 땅도 척박하여 걸핏하면 흉년이 들었다.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은 굶주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성경을 보면서 흉년 때 굶주렸던 자기들의 경험을 제일 먼저 떠올렸다.
탄자니아 사람은 개인보다 공동체가 훨씬 중요하다.
그들은 뛰어난 사람이 되기보다는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누가 굶주리면, 그게 자기 잘못이든 환경 문제이든 상관하지 않고 도와준다.
콩 한쪽이 있으면 반을 갈라서 나누어 먹는다.
아무리 흉년이 들고, 자기 잘못으로 재산을 허비했다 할지라도 친구라면 마땅히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탄자니아 사람은 성경을 나눔의 정신으로 본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만이 옳다고 주장하면 통일성이 아니라 획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와 다름을 기꺼이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관점과 생각을 수용하고 포용할 때 진정한 통일성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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