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을 불어 자유의 기쁨을 선포하라
입력 : 2016-11-11 21:03
찬송 : ‘환난과 핍박 중에도’ 336장 (통 383)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사무엘상 24장 4∼12절
말씀 : 본문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와 그에 대한 사울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피신했습니다. 그 정보가 사울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군사 3000명을 동원했습니다. 그 숫자는 다윗의 그것보다 5배 이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쟁의 승패가 용사의 숫자에 달려 있지 않다고 거듭 말씀하신 것(삿 7:4, 7 등)이 어떻게 되는가를 긴장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때 동굴 안에 다윗이 숨어 있는 줄도 모른 채 그가 뒤를 보러 들어왔습니다(삼상 24:3). 그의 동공은 아직 어둠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사울은 혼자였고 완전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누가 보아도 원수를 갚고 복수할 아주 좋은 기회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부하들이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며 그를 죽이자고 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라며 그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더라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전에 기름 부으셨던 그를 여전히 존중했습니다.
과연 우리 신앙에는 이런 담력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광야같이 거친 세상살이에서도 거칠어지지 않는 영성이 있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 말씀에 비중을 어느 정도 두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9, 신 32:35 참조)는 말씀이 적대자를 향한 우리 행동에 어떤 힘을 발휘합니까. 상황이 자신에게 아주 유리하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삼상 23:7, 24:4 참조). 그리고 자신의 거친 행동을 정당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다윗은 부하들을 만류하며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베어냈습니다. 이는 그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그리하지 않았다는 증거물입니다. 사울이 돌아간 뒤 그는 동굴 밖으로 나와 자기 자신을 해명했습니다(9∼15절). 이 말을 할 때 다윗은 사울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혈연관계 또는 존경심의 표현입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라며 크게 울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새의 아들’이란 낱말이 사라졌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 나중에 그가 다윗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이것은 악어의 눈물처럼 보입니다. 그 눈물이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감정이 여린 사람, 마음은 착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기분과 감정에 끌려 다니는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기도 : 하나님, 저희에게는 상황이 유리하면 억압하고 불리하면 굴종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저희로 하여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님을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구세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정현진 목사(서울 수도교회)